전통시대 동북아시아의 타투(문신)

 

전통시대 동북아시아의 문헌에서 문신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아버지이자 막내 동생인 계력에게 왕위를 양보한 태백중옹 형제의 고사와 연관되어, '단발문신斷髮文身', 즉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몸에 그림을 새긴 모습으로 주로 언급된다. 그리고 이는 지극한 겸양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 몸에 되돌릴 수 없는 행위를 하여, 천명을 받은 이에게 왕위를 넘긴 도덕적 행위로 언급된다. 그러나 중국이나 한반도에서나 이 문제는 겸양과 양보라는 미덕과 자기 몸에 대한 상해라는 유학적 도덕률에 대한 배반 사이에서 표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문신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언제나 '부정적 행위'라는 지점을 견지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문신은 그 자체로 문신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이역異域을 의미하기도 했다. 특히, ‘조제편발雕題編髮은 문신을 하는 오월(장강 하류 지역)이나 남만의 이민족과 편발(변발)을 하는 북방 오랑캐를 뜻하는 상투화된 표현으로 쓰였다. 이를 통해 오나 월을 비롯한 중국의 남방은 앞서의 예처럼 문신의 고장, 문신을 하는 비루한 풍습이 남아 있는 고장으로 고착화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조제''문신'은 비루한 남방의 풍습이며, 경우에 따라 남방 문화나 남방이라는 지역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쓰였다. 이러한 언어 습관은 이를 받아들인, 한반도의 제 국가와 그에 속한 지식인 집단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대 사회에서 문신의 풍속은 한반도에도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한서'나 '삼국지' 등의 고대 중국의 기록에서 초기철기~초기국가시대에 해당하는 마한, 변한, 진한 등 한반도 남부 지방에 대한 기록에는, ‘일본과 가까워 문신을 한 사람(혹 남녀)이 있다는 언급이 확인된다. 이러한 상황은 주로 한반도 남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지역에 문신의 풍습이 확인되며, 그에 대한 관찰자의 해석으로 일본과의 지리적 거리가 언급되었다.

 

 

(수정) 삼국지 위서 동이전 진한.jpg

위의 사료는 삼국지의 위서·오환선비동이전 중 진한의 풍습을 다룬 부분이다.

당시의 진한은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권을 포함하는 영역에 해당한다. 

"왜와 가까워 남녀가 모두 문신을 한다"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같은 기록의 마한 풍습에는 "그 남자들 중에 때로 문신을 한자가 있다"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하지만, 이러한 이역의 풍속에 해당하는 문신은 고려 전기 정도에는 이미 한반도 내에서 사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제도적으로 이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을 유력한 시기로는 강력한 한화정책이 펼쳐진 성종대(981~997) 정도를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하여 1123년의 고려 사회를 기록한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 단계에서는 중국 고래의 지적 전통 속에서 한반도를 형상화하던 이미지 중의 하나인, 문신의 풍속이 당대에는 이미 사라졌음을 확인하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 지식인이 갖추고 있었던 한반도에 대한 문자적 지식이 실제의 견문을 통해 교정되는 흥미로운 과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삼국지' 단계의 '문신' 풍속에 대한 이해가 송대의 지식인 일반에게도 유통되고 있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서긍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인데, 그는 '확인' 대상이 고려 내에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래의 지적 전통이자 편견 중의 하나였던, ‘한반도 문신 성행설을 수정하는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당시 서긍의 이동 경로에는 흑산도나 고군산군도 같은, 옛 풍습이 강하게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 역시 포함되기 때문에, 이러한 지적은 어느 정도 합당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 이러한 풍속이 어느 정도는 지속된 곳 역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전의 기록에도 일본과의 거리적 차이가 언급된 바와 같이 남부 해안 지역 등에서는 이러한 풍속이 더 오랜 기간 지속성을 가지고 유지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제주의 문화적 독창성, 고립성, 다양성은 이점에서도 빛을 발한다. 문신 풍습이 일부 고려 후기 기록 속에서 제주의 풍속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민사평의 '급암시집及菴詩集'에는 제주의 풍속으로 문신이 언급되고 있다. 이 경우 제주의 독특한 입지와 고립된 문화,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진 문화 요소의 긴 생명력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 역시 교화되지 않은 문신의 풍습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고, 그것이 제주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이의 눈에 이색적인 모습으로 남겨졌을 가능성이 있다.

앞서 검토한 바 있는, 조제雕題 역시 문신과 비슷한 표현으로 이마에 문신을 새기는 행위를 뜻하며, 역시 그러한 풍속이 있는 이역으로도 언급되고 있다. 한편, 조선에서는 조제가 일본의 별칭처럼도 사용된 바 있다. 흥미로운 점은 앞서의 '삼국지'나 이후의 각종 문헌에서 일본이 문신의 나라로 표상된다는 점이다. 아울러 문신은 일본인의 뿌리를 추정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에 따라 문신을 하는 오월인과 그 풍습이 옮겨갔다거나, 일본인들은 태백의 후손이라거나 하는 맥락 역시 제시된 바 있다.

일본이 문신의 고장, 조제 등으로 표상되기 때문에 자연, 그에 가깝거나 먼 지리적 거리 혹은 문화적 접근성 등에 따라 문신의 풍습이 강화되고 약화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도 있었다. 일본과 가까워서 마한 등에도 문신을 하는 문화가 있었다는 중국 사서 편찬자의 시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사서인 '동사강목'에는 중국 사료를 인용하여 일본의 풍속 중 팔과 얼굴에 하는 문신과 치아를 물들이는 칠치漆齒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아울러 임진왜란(1592) 직전 통신사로 일본을 찾았던 김성일이 통신사행 당시인 1590년에 남긴 기록 속에도 대마도와 일본 본토의 문신 풍습에 대한 표현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는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된 일본의 풍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문신 풍습의 존재는 일본의 미개한 문화적 수준, 중화의 교화를 받지 못한 야만적 상황을 표상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는 일본에 가면 누구나 꼭 확인하고자 하는 요소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실제의 풍속은 달랐을 수 있다.

택당 이식의 '동사록東槎錄'에서도 일본의 풍습으로 칠치와 문신이 언급되고 있다. 이 중 문신의 경우는 중국 고대 월나라의 풍속이라 적고 있다. 다만, 이것이 일본에 대한 상투화된 표현의 하나인지, 아니면 그가 직접 견문하여 확인한 것인지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동일 기록 내에서의 반복성, 그리고 사행단으로 그러한 시를 공유한 인물 등을 고려할 경우, 당시에도 그런 풍습이 일본 내에 남아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 같다.

이는 후대의 인물인 최성대崔成大의 '동사일기東槎日記'에서 통신사를 맞는 일본인들의 행렬을 세밀히 묘사하는 글에도 등장한다. 따라서 그 사회 내에서 만연한 것이든, 일부의 것이든 그런 문화 요소의 존재 자체는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일본에 대한 선행적 이해가 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이는 또 한 명의 '동사록' 기록자인 남용익의 글에서 자자刺字와 칠치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그것이 관념이 아닌 실제임 드러내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중국이나 우리의 고전시대 문인들에게 이러한 풍속은 대체로 이역의 남만이 가진 비루한 습속으로 인식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따라서 이러한 풍속이 거의 사라진 조선시대에는 문신이나 조제 자체가 문신의 나라로 표상되는 일본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신에 대한 중국이나 우리의 시각 속에 이처럼 부정적인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는 때때로 결연한 의지나 장대한 포부, 남자다움 등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진족 국가인 금과의 전투에서 활약한 남송의 장군 악비의 등에 있었다는 진충보국眞忠報國문신이다.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 고사는 다양한 신분, 시대와 국가에서 악비라는 무장을 기억하는 클리셰의 하나가 되었다. 이는 국가에 대한 충과 무인으로서의 강인함과 강한 의지를 표상하는 하나의 도구로 '문신'이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따라서 악비를 추앙하거나 악비와 같은 뜻을 표방하는 하나의 표상으로서, 무인 집단 내에서 문자 문신 등이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수정) 낭자 연청, 노지심 3.jpg 

(좌) 낭자 연청, (중간) 화화상 노지심, (우) 구문룡 사진을 그린 우끼요에 판화

('통속수호전호걸 108인' 시리즈, 19세기 일본 유명 우끼요에 작가인 우타가와 쿠니요시 作, 1927년)  

일본에서는 이와 유사한 타투 문양들이 이레즈미(일본식 문신)로 이어져 오늘날에도 시술되고 있다. 

 

이 외에 여항의 남자들이 자신의 의지와 뜻을 표현하는 도구로 '문신'을 사용한 흔적도 확인된다. 수호지에 등장하는 연청, 사진, 노지심 등의 문신에 대한 묘사는 이들의 강렬한 남성성을 표상하는 비문자비발화적 도구가 되기도 한다. 특히, 구문룡 사진의 몸에 새겨진 화려한 아홉 마리 청룡 문신에 대한 묘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양산박의 호걸들은 일종의 유협 집단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이러한 집단 내에서 이루어진 제한적인 '문신 유통'의 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으로 여항의 여성들이 연인의 이름이나 표식을 몸에 새기는 등의 일탈을 자행했던 내용도 일부 확인된다.

아울러 악비와 '진충보국' 문신, 수호지 인물들의 화려한 문신이라는 요소의 연결은 곧 무인 집단 혹은 유협 집단 내, 혹은 그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에서의 문신에 대한 관대한 시각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문신은 이들의 특성을 인식하는 하나의 도구로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인식 역시, 경우에 따라서는 오늘날의 그것처럼 아주 부정적인 경향만으로 흐르지는 않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은 무인이나 유협 집단, 기녀 등 ''과는 거리가 먼 집단으로 한정된다. 그리고 그것은 옷 속에 감추인 ''이라는 측면에서, 당대 그들이 활동하던 시공간 속에서 타인들이 설정한, 일정한 '거리감'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타투(Tatoo, 문신)에서 타부(Taboo, 금기)가 연상되는 현실은 그러한 상황들의 연장이라 볼 수 있다

 

글 : 아시아문화원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원 배재훈  

 

이 글은 <무등일보> 2018년 7월 30일자에 게재된 글입니다. 

http://www.honam.co.kr/detail/2bvcRQ/547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