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과 왕건, 그리고 왕건: 9-10세기 전환기에 등장한 세 명의 왕건

  

배재훈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사 

  

 지난 2018년은 고려 건국 1,100년이 되는 해였다. 고려는 태봉의 궁예弓裔 정권에 참여하고 있던 개성(송악) 출신의 무장인 왕건王建918년 세운 국가이다. 그는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신망을 잃고 있던 궁예에 대항하는 역성혁명을 일으켜, 태봉泰封을 대체하는 고려를 건국하였다. 그리하여 왕건의 후삼국 고려는 건국 초기 여러 위험들을 이겨내고,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여 통일국가 고려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 역사는 고대 사회의 여러 한계를 극복한 중세사회의 성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북아의 역사가 크게 요동친 9~10세기에는 왕건도 혼자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세 명의 대표적 왕건이 있었다.

 

 세 왕건 중 첫 인물은 중당기의 시인 왕건(王建, 767830)이다. 그는 당나라 시대의 유명한 시를 모은 「당시선」, 「전당시」 등의 시문집에 여러 작품을 수록한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는 낮은 신분 출신으로, 사회적 성공을 위해 자신의 문학적 능력을 끊임없이 소비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빈한한 삶의 연장에서 자신의 비루함을 낳은 시대와 풍조를 공격하고, 변화와 개혁을 위한 날선 비판을 거듭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낮은 관직을 전전하고, 여러 유력 절도사의 휘하를 옮겨 다니며, 자신의 문학적 기능으로 유세를 펼쳤던 가여운 지식인이기도 했다.

 

하염없이 지아비를 기다리는 곳

강물은 유유히 흘러가고

 

끝내 돌로 변하였어도

기어이 머리를 돌릴 줄은 모르네

 

산머리에서는 매일매일

바람이 비로 변하건만

 

떠난 이 돌아오는 것만이

돌로 하여금 입을 열게 할 듯

 

 위의 글은 그의 시 <망부석>이다. 여기에서 망부석이라는 시어는 시대 변화의 한 복판에 서 있던 시인 자신을 의미한다. 당시 지식인 사회는 산머리에서 매일매일 바람이 비로 변하듯 정치적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망부석처럼 지아비인 당나라 사회의 안정기가 다시 오길 기대하며, 위의 시를 썼을 것이다. 9세기 전반은 동북아시아의 고대 사회가 종말을 고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그 시점에 등장한 왕건의 시는 분열과 종언을 향해 치닫는 시대 변화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맞서는 사마귀의 치켜세운 앞발과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의 작은 행동만으로 역사의 큰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전촉 황제 왕건릉(영릉) 전경, 중국 성도시 소재. Copyright ⓒ 2014, AlexHe34, all rights reserved .jpg

전촉 황제 왕건릉(영릉) 전경, 중국 청두시 소재. 사진 AlexHe34

  

 비슷한 시기를 살다간 두 번째 왕건은 유비의 옛 땅에 전촉前蜀이라는 국가를 세운 왕건(王建, 847918)이다. 당나라 시대 오늘날 중국 쓰촨성의 청두(성도)를 포함하는 옛 촉 지역은 서천西川이라 불렸는데, 이곳에는 검남서천절도劍南西川節度가 설치되었다. 여기서 절도節度는 군사 조직을 통솔한다는 의미이며, 그 우두머리가 절도사節度使였다. 이 제도는 본래 당나라가 다른 외부 세력들과 접하는 변경 지역에 설치한 독립적인 지방조직이자 군사조직이었다. 그러나 차츰 유력한 인물들이 절도사가 되어 외지에 부임하고, 이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정치군사적 힘을 기르게 되었다.

 

 전촉의 왕건은 하층 계급의 무뢰배 출신으로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가운데 공을 세워, 유력한 군사 지도자 중의 한 명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촉 지방으로 피신하는 당 희종을 호위하여 신임을 얻었으며, 권세를 쥔 환관인 전령자(田令孜, ?893)의 양아들이 되어 정치적으로도 영달했다. 이후 왕건은 양아버지인 전령자와 그의 형 검남서천절도사 진경선陳敬瑄을 죽이고, 촉 지방을 손에 넣었다. 이후 그는 이무정李茂貞의 한중까지 점령하여 촉왕에 봉해지고, 907년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자립하여 황제가 되었다.

 

 그는 무인 출신임에도 치세 전반에는 명민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문예를 숭상하여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도 수많은 당시의 문인들이 성도를 찾게 만들었다. 이는 무뢰배 출신이라는 자신의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행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변방의 촉 지역이 또다시 중원의 문화와 문물을 보호하는 공간이 되었다. 다만, 집권 후반 중원으로의 군사적 진출이 몇 차례 실패한 이후로 가혹한 통치가 시작되고, 초창기의 개혁적 정치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건의 촉은 그의 기대와는 달리, 918년 그가 사망하고 난 뒤 불과 7년 정도 더 이어지다 멸망한다

 

   고려 태조 왕건 청동좌상 상반신, 고려박물관 소장(자료 제공, 국립문화재연구소).jpg 

 고려 태조 왕건 청동좌상, 평양 조선중앙역사물관 소장.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세 번째 왕건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다. 1,100여 년 전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 왕건도 제왕을 꿈꾸기란 불가능한 낮은 신분 출신이었다. 그는 신라의 지방 촌주村主 정도의 직위를 가졌던 사찬沙飡 왕융王隆의 아들로 송악(개성)에서 태어났다. 통일신라 말기에 들어서면 중앙에서 파견한 관료들의 지방 통제는 거의 유명무실해졌다. 그리하여 신라는 각 지역의 유력자인 촌주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그들에 대한 대우를 파격적으로 개선했다. 왕융에게 주어진 사찬이라는 관위 역시 그와 같은 통일신라 말기 사회상의 흔적이다.

 

고려+태조+왕건릉.jpg   

 고려 태조 왕건릉(현릉) (좌)전경과 (우)정자각, 황해북도 개풍군 소재, 북한 국보 제179호. 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사찬은 신라의 17관등 중 8위에 해당하며, 진골의 아래에 있던 6두품이 주로 받을 수 있던 것이었다. 이 관위를 지닌 인물들은 중앙 행정 조직이나 군사 조직의 부장이나 차관급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촌주라는 위치는 오늘날 개념으로 보자면, 지역의 면장이나 읍장 수준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유력자들이 실력과 무력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무한히 확대하던 시점이라 이웃한 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인물들 중에 진골 신분이나 가능하던 장군을 칭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이들이 바로 이 시대의 주인공인 호족이며, 사찬 왕융 역시 서해안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활동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한 호족 중의 한 사람으로 이야기된다. 그렇다면 왕건의 현실적인 지위는 돈 많은 외항선 선주의 아들 정도가 될 것이다. 오늘날이라면 면장 정도나 했을 인물의 아들이 실력과 재력을 기반으로 점차 성장하여, 왕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궁예를 몰아낸 이후 왕건은 적극적인 혼인 정책을 비롯한 각종 우대 정책을 통해 호족 연합 정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후삼국의 혼란기를 종결하는 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다.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치는 시기는 동북아시아의 격변기였고, 국제적으로도 새로운 체제가 기지개를 켜며 도래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시인 왕건은 그런 변화를 주목했던 인물이며, 기존 체제의 몰락에 가슴 아파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변화를 긍정할 수는 없었지만, 명백하고 피할 수 없는 변화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무인 출신인 두 왕건은 스스로를 시대 변화의 주인공으로 인식한 인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전촉의 왕건과 고려의 왕건이 역사적으로 담지한 역할은 닮은꼴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 왕건은 실패했고, 다른 왕건은 성공할 수 있었다.

 

 ‘왕건과 왕건, 그리고 왕건’, 이들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족적을 크게 남긴 인물들이지만, 각각의 성과는 모두 달랐다. 시인 왕건이 무너져 가는 당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면, 전촉의 왕건은 그 한 축을 크게 흔든 인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촉의 성립은 그가 거둔 소기의 성과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나라는 단 2, 불과 십여 년 간 유지된 단명 왕조로 문을 닫았다. 반면, 고려의 왕건은 한반도의 혼란을 통일하고 향후 500년 가까이 유지된 중세 국가의 안정된 체제를 성과물로 거둘 수 있었다

 

 918년 건국된 고려는 궁예 정권 후반기의 혼란 위에 세워졌다. 따라서 그 정치적 기반이 튼튼하지는 않았다. 왕건은 전제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었고, 수많은 호족들과의 타협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그렇게 권력을 분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송악 호족의 아들로서 이전 시대의 낡은 제도에는 기대할 것이 없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따라서 시대 변화에 대한 감수성에 있어서 왕건은 그 누구보다 우월했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체제와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중세 사회는 그가 세운 국가 고려위에 성립할 수 있었다

 

배재훈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