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들 삶이 팍팍하지 않으랴: 오래된 이웃, 광주 화교 이야기

  

안재연(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사)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있는 광주는 인천이나 부산처럼 대규모 차이나타운이 없거니와 등록된 화교 수가 고작 300여 명이며 그 수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광주 화교는 3세대가 주류로 이주나 이민, 출생률 저하로 인한 학령인구 감소, 한국인과의 결혼 증가 등이 주요 변화 요인으로 꼽힌다. 한국에 거주한지 오래되고 한국인과의 결혼이 늘어남에 따라 식탁이나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도 혼합 양상을 보인다. 제사상에 한식과 중식을 섞어 올리고, 명절 음식도 추석엔 송편과 웨빙(月餠)을, 설에는 떡국과 쟈오쯔(餃子)를 같이 준비한다. 평상시에도 중식과 한식을 같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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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0일 광주 하남 산업단지 대흥주물에서 쇳물을 녹여 가마솥 주형에 넣는 모습 

 

한국 화상(華商)의 대표적 업종을 흔히 짜장면집으로 부르는 중화요리점으로 알고 있지만, 포목점, 한의원, 주물공장, 벽돌공과 같은 화공(華工) 등도 우리나라 경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씨1950년대 남원 출생으로 광주로 시집 와서 명절과 의례를 배웠고, 지금은 집안의 어른으로서 의례를 주관하고 전수한다. 시아버지 대에 창업한 대흥주물은 광주 지역의 대표적 화교 기업으로 지금은 차남이 운영하고 있다. ○○씨 가정의 제사문화를 살펴보자.

  화교들은 조상에 대한 제사상을 최대 1년에 네 번, 설과 청명절, 백중, 그리고 한의절(寒衣節)로 불리는 음력 101일에 차린다. 우리와 달리 돌아가신 후 지내는 기제사는 3년만 지낸다. 요즘은 제사상을 설에만 차리고 다른 날에는 간단히 꽃과 과자, , 과일만 준비하며, 그나마 생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빨간색을 쓰는 것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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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1975120일 취OO씨 결혼식 축의금 명단 (우) 2004년 11월 7일 차남 성혼증명서 

 

우리는 추석에 제사는 없어요.... 백중날, 그 다음에 청명과 한의절 그때 차리죠. 지금은 꽃만 가져가요. 납골당이니까. 예전에는 집에서 똑같이 준비했어요. 청명날도 커요. 근데 우리는 보통 제사는 3년이면 끝나요.  우리 같은 경우는 시아버지, 시할아버지도 모시잖아요, 시어머니랑. 시어머니는 2008년도 돌아가셨는데, 바로 전 해에 친어머님이 돌아가셨고, 남원 구례 하늘공원이라는 납골당에 모셨는데, 남편이 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시어머님도 그렇게 모시게 됐어요. 그리고 나중에 시아버님도 합장해서 이장했죠.”

 

전통 상장례에서 스다완(十大碗)’이라고 10개의 탕()을 내던 풍습도 가짓수나 종류가 대폭 줄거나 장례식장 음식으로 대체되는 실정이다. 망자를 모시고 갈 종이 말이나 소, 동남동녀(童男童女), 가짜 돈, 빨간색 테두리 흰 바탕에 금은박지로 만든 동그란 동전 모양의 반원 모형을 박아 넣은 돈상자 등을 만들어 입관 직전 같이 태우는 정도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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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1995714일 취OO씨 시부 탈상 때 세운 가짜 집과 동남, 가짜 돈 (우) 1995년 7월 14일 시부 탈상 때 봉분 앞에 차린 제사

 

중국인의 제사상은 우리나라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과일, 중국과자, 음식 등 모두 3, 5, 7 등 홀수로 올리는 점은 동일하다. 봉분에서부터 첫 줄에 고기완자, 닭, 생선 등 육, , 공이 조화롭게 된 요리를 올리고, 각 접시마다 노란 지단, 빨간 색으로 물들인 당면, 시금치를 얹어 색의 조화에 신경을 쓴다. 이는 동시에 음양오행을 따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닭머리는 자르지 않고 다리도 삼계탕 닭처럼 조금 다르게 꼰다. 그 다음 줄에는 중국 과자 5, 맨 마지막 줄에는 과일과 보보, 쟈오쯔를 올린다. 탈상 전에는 맨 보보를, 그 후에는 대추를 박은 보보를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5개를 놓는다. 중국인의 제사상도 우리처럼 금기가 있다. 가령 이별(離別)의 리()와 발음이 같은 배(, 중국어 발음으로 리)를 올리지 않거나 털이 많은 과일, 복숭아는 올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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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24일 설 차례상. 오른쪽부터 부모, 남편 영정

 

OO씨1992년 시부 장례식을 인천에 사는 화교 어르신이 알려주어 따라서 했다고 한다

 

시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는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출발하면서부터 광주에 올 때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지전을 태워서 길에 날려 보내면서 왔어요. 인천에 사는 라오다(老大)라는 분께 배워서 한 것이죠. 그분도 돌아가셨다고 해요.”

 

전통 의례나 명절 등의 의미를 알려주던 화교 1, 2세대가 많이 돌아가셨고, 번거롭고 힘겨워 어떤 식으로든 간소화해야 한다고 여긴다. 제사가 문화 정체성의 일부라고 여기지만 다음 세대에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도 갖고 있지 않다.  

 

시아버지 장례 때만 해도 여자는 장지에 따라가지도 못해서 저는 사진으로만 봤네요. 탈상 때는 가고요. 이제 저 죽으면 누가 하겠어요?” 라고 취OO씨는 말한다.

  

여자만 힘들게 준비하고 장지에도 못 따라 가게 했는데 왜 제사를 계속 하시나요?” 라고 되묻자 그냥 해야 하니까요.”  라는 아주 짧은 답변이 돌아왔다

 

남들 눈에는 주물공장 사모님이자 전업주부로 살았던 팔자 좋은 외국인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아버지 대부터 광주에 터를 잡은 지 7-80여 년간 화폐개혁으로 애써 모은 돈이 휴지조각이 된 경험, 중국집에서 한 때 밥을 못 팔게 해서 억울했던 마음, 점포나 집 면적의 제한으로 해외 이민을 택한 가족이나 친지들과의 생이별, 5·18 때 목숨을 걸고 광주를 탈출한 기억, 시부모와 남편을 먼저 보내고 여기저기 아픈 몸으로 아직도 자식 끼니 걱정을 하는 그녀의 삶은 고단했던 광주 화교 사회의 역사를 응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냥 해야 하니까요.”  

 

이 말은 매년 정해진 날, 지겹도록 똑같은 음식을 차리며 삶을 묵묵히 감당했던 선조가 알려준 지혜일지도 모른다. 그냥 하라고, 하다보면 세월이 흘러 부모를 보내고 천애고아가 된 설움도 녹고, 어린 자식이 장성해 손자, 손녀를 안기며, 다음날 끼니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먹고 살 수 있는 날이 온다고 깨닫고 위로를 받은 건 아닐까. 차별과 배제로 점철된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느라 고군분투했던 광주 화교들의 제사에서 우리네 제사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2022()광주화교협회에 따르면 등록된 화교 중 약 1/3 정도가 이미 한국으로 귀화했다고 한다. 한 세기 가량 여기에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먹는 것, 입는 것, 말하는 것도 광주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2015년 광주에 이사 왔으나 광주 억양은 흉내도 내지 못하는 내게, 구수한 남도 사투리로 그간의 삶의 내력을 이야기하는 취OO씨를 인터뷰하는 내내 누가 진정 광주의 오래된 이웃인지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 사진 취OO씨 제공 

  

안재연(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사)

 

<참고한 글>

노혜진. 「차별과 타자화 속의 한국 화교의 정체성: 광주지역 화교를 중심으로」, 전남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12.

박선홍. 광주 1백년: 개화기 이후 풍물과 세속, 광주: 금호문화, 1994.

이정희. 화교가 없는 나라, 서울: 동아시아, 2018.

林容华. 中国传统节日的文化内涵和价值意蕴, 海峡教育研究, 11, 2020, 20-45.

Laurence J. C. Ma, Carolyn Cartier, et al. The Chinese Diaspora: Space, Place, Mobility, and Identity, Boulder: Rowman & Littlefield, 2003.

   

 

아주 오래된 이웃-광주 화교 사회와 음식 문화 

<아주 오래된 이웃>은 광주에 뿌리 내린 화교 사회와 음식 문화를 조명하는 전시입니다. 이 전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에 기여한 '광주 화교'를 재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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