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유목민의 가장 오래된 서사 영웅 <마나스>가 광주에 온 이유
전봉수(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학예연구사)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사업은 2005년부터 시작되었지만, 여러 이유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2015년에야 개관하게 되었다. 이 조성 사업의 영문 이름(Hub City of Asian Culture)에 걸맞는 허브 역할을 하기 위해 설립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이제 개관 10주년을 코 앞에 두고 있다. 필자는 2015년 11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개관식 참석을 위해 광주에 모인 한-중앙아 5개국 문화 장관들이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 문화콘텐츠의 창·제작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자'고 합의한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 공동합의는 2012년에 개최된 한-중앙아 5개국 문화 장관 회의의 합의보다 구체적이었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제2차 한-중앙아 문화장관 회의의 결과물인 공동 합의문에 근거해 중앙아시아 국제협력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광주에서 한-중앙아 문화장관 회의를 두 차례 개최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으며, 특히 두 번째 회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식에 맞춰 개최된 만큼, 이 시점을 기점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중앙아시아 국제협력사업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 다섯 나라인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과 협력해 실크로드 국가의 문화, 역사, 자연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 그림책을 30여권 출판했으며, 이 책들은 한국어와 영어뿐 아니라 러시아어와 협력 국가 언어로 배포되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아시아 이야기 그림책 시리즈는 모든 세대를 대상으로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문화와 역사를 담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작은 악사』와 투르크메니스탄의 『웃는 용』그리고 타지키스탄의 『마법의 샘』은 현지인 작가와 한국인 그림작가가 협업하여 공동제작했으며, 그림책 출판 후 공연 제작까지 이루어진 성공적인 사례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타지키스탄의 파미르고원, 실크로드의 핵심 도시로 알려진 세계유산 도시 사마르칸트, 카자흐스탄 유목민의 영혼과도 같은 전통 집 유르트, 신이 키르기즈 민족에게 주었다는 영혼의 유산인 남성 전통 모자 칼팍, 오구즈 투르크 계열의 위대한 유산인 투르크메니스탄의 전통 카펫을 소재로 자신들의 문화와 자연유산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라는 세계를 향한 창을 통해 소개할 수 있도록 하였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이들과의 상호호혜적인 협력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중앙아시아 협력은 출판과 공연 제작에 이어,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유목민의 구전전통이자 영웅서사시인 <마나스>에 대한 연구 와 전시로 이어졌다. 키르기즈 민족 영웅의 이름이자, 장편 서사시의 제목인 <마나스>는 주인공 마나스가 서요(흑거란)의 핍박과 공격을 받으면서, 전장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 민족을 지켜낸 영웅 이야기이다. 서사시 <마나스>는 영웅 마나스와 그의 아들 세메테이 그리고 손자 세이텍에 이르는 영웅 삼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러시아와 영국의 중앙아시아 충돌 시기에 이르기까지, 키르기즈 민족은 기록보다는 구전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전해왔고, 이들의 구전전통 중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서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마나스 서사시이다.
영웅 마나스가 대적했던 흑 거란은 고려 영웅인 강감찬 장군이 대적했던 거란의 후손이다. 또한 남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상류와 몽골고원에서 집단을 키워갔던 키르기즈 민족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후방을 교란한 돌궐(튀르크계 언어 사용 민족)의 하위집단으로,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관점에서 우리와는 형제와 같은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저 이역만리 천산산맥과 파미르고원 그리고 힌두쿠시산맥 북부지역까지 이르는 지역에 넓게 자리 잡고 살게 되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이 예니세이강 상류라는 것을 생명처럼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문화·지리적 배경 속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실크로드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산악유목 전통 국가인 키르기스스탄의 국립역사박물관, 국립미술관, 유목민박물관, 오쉬지역 고고·역사박물관, 프룬제박물관 등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자원을 아카이빙하고 이를 기반으로 디지털 큐레이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런 양국 협력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키르기스스탄 국립극장들의 마나스 주제 국제 공연 창·제작으로 발전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공연 <세메테이, 영웅의 조건>이다.
공연 <세메테이, 영웅의 조건>의 한 장면
공연 <세메테이, 영웅의 조건>을 제작하기 위해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키르기스스탄 문화부가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공감대를 가지고 재원을 공동으로 투자했다. 공동 연출이 선임되었고, 두 나라 배우와 음악가들이 참여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국제 창·제작이 시작되었다. 개도국 파트너가 재원을 함께 투자하고, 이번 시범 공연 개최 이후 내년에 개최될 자국 내 본공연 개최에 드는 비용을 전부 부담하겠다는 선언은 이번 공연 공동제작이 키르기스스탄 측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콘텐츠 제작이 지속 가능한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담이지만, 양국 문화부 장관이 배우 출신이며, 키르기스스탄 막수토프 알튼백 문화부 장관이 우리나라 배우 박신양과 러시아 연극학교 동창이라고 언급한 것이 이번 공연 공동제작의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오는데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이제 곧 개관 10주년을 맞이한다. 이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아시아 국가들의 다양한 파트너들에게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협력하게 되면 혁신적이며, 성공적인 모델을 만들어갈 수 있는 확신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세메테이, 영웅의 조건>은 국제협력이 아시아 문화자원 정보 수집과 서비스, 연구 조사, 전시 및 공연 제작으로 이어지고, 다시 국제협력으로 선순환되는 모델인 동시에, 파트너 국가의 문화가 지속 가능한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실크로드 유목민의 영웅 마나스가 광주에 온 이유이다.